국내 한 대기업에서 엔지니어로 근무 중인 A(29)씨는 지난달 SK하이닉스의 경력직 전형인 ‘주니어 탤런트’에 지원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입사한 지 올해로 3년 차. A씨는 “조직 개편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기업 문화도 잘 맞지 않아 이직을 결심했다”며 “경력이 3년밖에 안 되지만, 지금 직무를 살리고 연봉 인상을 기대할 수 있어 이직에 도전한 것”이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3년 전부터 2~4년 차 경력자를 선발하는 ‘주니어 탤런트’ 전형을 실시하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올해 세 자릿수를 뽑는 주니어 경력자 전형에 수천 명이 몰렸다”며 “올해 유독 젊은 경력직 지원자가 많다”고 말했다.
대기업 경력 채용 시장이 달라지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최소 5년 차 이상을 뽑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업 입장에서는 그 정도는 돼야 현장 경력을 인정하고, 경력직 지원자의 성과를 평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직 희망자들도 5년은 근무해야 회사 내 입지와 근무 환경을 고려해 이직 여부를 결심할 수 있다는 분위기였다. 최근에는 5년 차 미만이 경력 채용 시장에서 가장 수요가 많다고 한다. ‘평생 직장’ 개념이 없는 젊은 직장인들은 이직에 거리낌이 없고, 기업은 ‘싹수’가 있는 주니어 연차를 일찌감치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 SK온, 엔씨소프트 등 일부 사정이 어려워진 기업이 1~2년 차부터 희망퇴직을 받으면서 ‘주니어 경력 시장’은 더 활발해지고 있다. 헤드헌팅 회사인 유니코써치 김혜양 대표는 “요즘 경력 채용 시장에선 부장이나 임원급 채용은 줄고, 대리·과장급인 3~5년 차 수요가 가장 많다”며 “조금이라도 연봉이 높으면 옮기는 젊은 직장인, 신입 교육 없이 바로 실무에 투입할 수 있는 경력을 선호하는 기업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말했다.
◇‘싹수’ 있는 인재 잡아라
최근 주니어 경력은 인공지능(AI), 반도체, 로봇 등에 집중돼 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올해 처음으로 경력 2년 차 이상 ‘주니어’ 경력자를 대상으로 한 ‘퓨처 엘리트’ 전형을 만들었다. 대상은 반도체나 AI 같은 신사업 분야다. 일반 사무직보다는 공대 출신 엔지니어 인재가 부족해 아예 새로운 전형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디스플레이 관계자는 “인재를 미리 확보하려고 2년 차로 기준을 확 낮췄다”고 말했다.상시 채용을 하고 있는 현대차는 몇 년 전부터 로봇 엔지니어, 차량용 반도체, 모빌리티 서비스 플랫폼 등 IT 직군에 대해선 최소 경력 기간을 3년으로 낮췄다. 일반 사무직 경력이 보통 5년 정도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신사업 전략을 위해 다른 기업의 인재에 대해서도 채용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고 말했다.
주니어 경력의 장점은 바로 실전에 투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처음으로 경력직의 연차를 기존 4년에서 2년으로 대폭 확대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저연차 주니어 경력자는 해당 직무에 대해 기본적인 경험이 있어 빠르게 현업에 투입할 수 있는 게 강점”이라고 말했다.
◇MZ “돈 더 주면 미련 없이”
주니어 이직의 활성화는 대기업 중에서도 규모가 작은 계열사나 중견기업들엔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인재의 ‘부익부, 빈익빈’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국내 한 대기업 계열사 관계자는 “기껏 뽑아서 교육시켜 일시킬 때쯤 되면 큰 기업으로 가버리니 애로 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라며 “누가 이직할 때마다 회사 분위기도 어수선해진다”고 말했다. 반도체 장비 중소기업 관계자는 “10명을 뽑으면 7명은 5년도 안 돼 삼성전자·SK하이닉스로 이직한다”며 “이들을 붙잡으려 비슷한 수준의 연봉과 복지를 제공하면서 회사 부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젊은 세대의 자유로운 이직 문화 때문에 경력 채용뿐 아니라 신입 채용에서도 이미 경험을 가진 ‘중고 신입’이 늘고 있다. 이미 대기업에 합격하고도 더 좋은 기업, 더 좋은 직무로 쉽게 옮기는 MZ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작년 대졸 신규 입사자 4명 중 1명(25.7%)은 경력을 갖고 입사한 ‘중고 신입’이었다. 중고 신입은 경력이 있는데도 신입 공채로 다른 회사에 다시 입사하는 것이다. 다른 대기업에 다니다 삼성전자에 신입으로 입사한 B씨는 “더 좋은 회사, 더 좋은 직무를 위해 이직을 감행했다”며 “최근 입사 1년 신입 교육에 갔는데 같은 팀 10명 중 5명이 다른 기업에서 일하다 왔더라”고 말했다.